latespring 2013. 2. 21. 19:51


  2012.2.21.


  정신분석의 작업이 전재하는 인간은 뼈, 살, DNA의 인간이 아닌 말, 이미지, 욕망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인간은 음식물만이 아니라 말과 이미지를 먹으며 생존한다. 그리고 그렇게 섭취한 말과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 분비물(욕망, 환상, 쾌락)과 함께 세계를 고유한 방식으로 체험한다. 마음의 병이란 바로 그 체험의 방식이 이 세계와 화해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주체의 고유한 표지들이다. (책머리에)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상식'에 힘입어 타자와 쉽게 화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삶과는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 내면에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감당하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를 분열시킬 수밖에 없다. 타자와 화해할 수 있는 '나'는 결국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한 '나', 쪼개진 '나'의 이면으로서의 '나'일 뿐이다. (6쪽)



  환청의 주된 내용이 욕설인 것은 그것이 주체를 고정시키는 데 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예외적인 어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수한 어휘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가령 나는 학교에선 '선생님'이고 집에선 '가장'이며 조기축구회에선 '골키퍼'이다. 이렇듯 무수한 명사와 수식어들로 나 자신을 지칭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의 존재가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상징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의 이면에는 근원적 소외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 정체성('나')과 존재('이다')가 분열되어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분열은 역으로, 자신이 원치않는 호칭에 의해 지칭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존재'가 '정체성'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이 단지 허위(상블랑)에 불과한 것이라며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위에는 한계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향한 욕설을 듣는 경우이다. 왜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던진 욕설을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왜 그것이 한낱 허구일 뿐이라며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욕설이란 '외관'이 아닌 '존재'를 겨냥하는 특권적 시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욕설은 '정체성'과 '존재'의 분열을 봉합하는 예외적인 지점이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욕설은 말의 행위의 최고봉 중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26쪽)



  임상이 '폐제'라는 정신병적 구조를 전제하면서도 주체의 개별성을 겨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재는 주체들 간에 공유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고유한, 그럼에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이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30쪽)


개념(상징계, 대상 a, 폐제, 주이상스)에 대한 이해 없이 읽어나가는데 무리를 느낀다.

그래도 이해하고 읽기보다, 읽어나가면서 이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