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2013. 2. 25.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지난 겨울에 산 부츠는 두어 번 신어보니까 왠지 거북해서 신발장 안에 넣어놓고 잊어버렸다. 돈이 떨어지고 나니까 내가 그 부츠와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었던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높은 굽이 박힌 부츠였다. 높은 굽은 몸을 위로 띄워서 상반신을 긴장시키고 젖가슴을 전방으로 밀어내는데, 발목을 덮은 털가죽은 위로 뜬 몸을 다시 땅 쪽으로 끌어당겨 주저앉힌다. 그 부츠에 대한 나의 거북함은 아마도 그렇게 거꾸로 작용하는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년 연말 상여금을 받아서 그 부츠를 샀다. 직장을 버리고 돈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그 부츠와 나 사이의 허섭스레기 같은 인연이 이제는 서먹하다. 돈이 있을 때, 돈이 들어올 전망이 있을 때와 돈이 다 떨어졌을 때, 돈이 들어올 전망이 없을 때 그 두 국면에서 사물과 나 사이의 정서적 관계는 바뀌는 것인데,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그 인연의 하찮음이 보인다. 그래서 앞으로 또 돈이 생기면 그런 하찮고 덧없고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인연이 계속 쌓일 것이라는 예감이 온다. 돈이 다 떨어지니까 신발장 속의 부츠는 구두가 아니라 나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낯선 짐승처럼 느껴졌다.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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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으로 쓰지 못하겠다던 사람의 삼인칭 소설을 읽고 일인칭 소설로 넘어왔다.
여성의 언어를 모르겠다던, 그래서 자신의 소설 속 여진을 빨리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던 소설가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인칭 소설을 썼다. 글의 문장은 이전 소설과 비슷했는데, 화자만 여성으로 바꼈다.
여성과 남성의 말이 다른 것인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장에 성성(姓性)을 부여하는 것인가? 젠더의 개념으로 그 구분이 가능한가? 를 고민하다가 나는 전공에서 무얼배웠나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 젊은날이 애처로워진다.
일인칭 소설이어서 그런지, 아직 주인공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이름이 끝끝내 안나오면 어떻하지?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뒤통수가 가려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