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속수무책

너 홀로 걷는 여름에

latespring 2024. 10. 4. 17:27

 

  최선을 다했어요.

 

  언제쯤 그런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꾸짖고 구박하는 여름 속의 나인데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사랑을 떠올리면 들렸어요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목소리

 

  나는 자살유가족입니다

 

  수년 전 여름, 울리다 만 아버지의 전화 소리가

  돌연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할 때

  나 또한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요

 

  멍해지는 여름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를 멈춰 서게 하는 사랑 또한 나의 여름 속에 있습니다

 

  지난겨울, 어두운 골목길

  통조림 뚜껑에 손을 베이고

  한쪽 눈을 잃은 고양이 두 번씩 눈을 깜빡이고

  만지지 않고도 손결을 느끼고

  말하지 않고도 대화가 이어지던 그 밤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고 싶었어요

 

  최선을 다했잖아요

 

  매일 아침 일곱 시

  사과를 씻고 커피콩을 갈고 물을 끓이며

  오늘의 날씨를 확인합니다

 

  오늘의 창으로 오늘의 날씨를 맞이하며

  내일의 시를 위해 오늘은 오늘의 시를 쓰기로 하고요

  아직은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나만의 시 나만의 놀이

  나만의 장난을 이어갑니다

 

  사랑과 물결 사랑과 햇빛 사랑과 올빼미 사랑과 학교 사랑과 운동장 사랑과 물방울 사랑과 구름 사랑과 로댕 사랑과 흰 개 사랑과 물고기 사랑과 이파리 사랑과 낮잠 사랑과 음악회 사랑과 소아과 사랑과 망원동 사랑과 숨바꼭질 사랑과 돌멩이 사랑과 열두 시 사랑과 첫눈 사랑과 자두 사랑과 자장가 사랑과 바이올린 사랑과 유리잔 사랑과 부케 사랑과 박하 사랑과 히비스커스 사랑과

  꼬리풀 블루 꼬리풀 블루......

 

  끝없는 놀이 끝에 슬픔이 조금 묻어난다면

  잠시 멈추기로 합니다

 

  또 한 겹 흘러가도록

 

  약속했거든요

 

  오늘의 날씨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오후엔 약한 비 소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최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