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짙은 잎그늘이 어리자 담벼락이 일렁인다
담벼락 아래 계단이 딱딱하게 굳은 관절을 꺾었다 펴며 술렁거린다
저 그늘 속엔 얼마 전까지 노파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해종일 우멍하게 깊은 눈구멍으로
오가는 이들을 무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거동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그늘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가끔씩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노파의 소매 스적이는 소리와 잎그늘
뒤척이는 소리가 한몸이 되어 들려오던 골목길
언젠가 나뭇잎 그늘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왔을 때
이봐 젊은이, 손을 얹고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건네왔을 때
나는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빛이 감춰둔 늪 속에라도 빠져들듯 더럭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른다
녹물을 끼얹은 나뭇잎 하나가 남은 햇살을 그러쥐고
작심한 듯이 뚝 떨어져내릴 무렵
떨어져내린 나뭇잎이 제 그늘과 바싹 붙어서
바쁘게 오가는 발길들에 바삭바삭 부서져내리고 있을 무렵
자리를 뜬 노파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이듬해 밑동에서 어린 가지 하나만이 쑥 올라왔다,
허리 구부정한 나무가 짚은 지팡이었다
-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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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듬성한 나뭇잎 그늘 아래 벤치에서 이 시를 읽는데, 노부(老夫)가 옆자리에 앉으며 덥다한다. 나는 일순 안녕하세요했다. 나의 공부와 성씨와 고향을 묻는다. 한낮의 말동무에게 200원짜리 자판기커피를 얻어마셨다. 짧은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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