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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책 이야기39

아무튼, 술 첫문장     술과의 첫 만남은 요란했다. 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술이 내는첫 소리까지도 사랑한다. (중략)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이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33쪽) 2025. 3. 4.
허송세월 새는 마지막 며칠을 견디고 있다. 나뭇잎사이로 햇빛이 들어와서 어미 새 머리가 반짝인다. 새가 알을 품은 지 보름이 되어온다. 이제, 알 속에서는 희미한 생명이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이다. 이 생명은 멀리서 가물거리는 호롱불과 같은데, 그 숨결은 어미 새만이 알고 있다. 새는 서두르지 않는다. (68쪽)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읍(泣)'이라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哭)'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涕)'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 2025. 2. 14.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첫문장    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구조 요청 메시지였어요.   2024. 11. 29.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조금 더 비밀스럽게 만들면 그게 '시'가 돼요. 그렇게 쓴 시를 매번 그에게 보내요. 나의 글을 세상 누구보다 먼저 받아보는 독자이자 나만의 당신이죠. 최선을 다해 속마음을 시에 담아내고 있는데, 그는 읽으면서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르겠어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나이 어린 소년 같거든요. 하여튼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작품에 담다보니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31쪽)   2024. 12. 6.    그의 날숨에 나는 얼른 들숨을 쉬었는데 따뜻한 봄냄새가 났어요. 상대방의 체취가 좋게 느껴진다면 그들은 천생연.. 2024. 11. 29.
김선우의 사물들 2024. 3. 19. 숟가락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먹기 위해 드나드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숟가락을 향해 나는 종종 묻는다. 이 숟가락은 몇 살일까.  숟가락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술을 스쳐 내 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숟가락으로 따순 국물을 떠먹었을까.   2024. 3. 21. 거울 봄밤이다. 먼 산 능선에 홍반처럼 번져 있던 산벚꽃들은 이미 스스로의 열기 속으로 사라졌다. 꽃이 자기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 꽃은 진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그러할 것이다.   2024. 3. 24. 의자 의자는 직립의 기술을 습득한 인간이 최초의 출발지를 찾아가는 여정에 놓은 사물이다.   2024. 3. 27. 반지 여리디여린 꽃대에 자기 존재 전부로 다만.. 2024. 3. 20.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2023. 7. 18.  첫문장    혼비씨,라고 처음 불러봅니다.   "Keep the sunshine. 햇살을 간직해."   (24쪽)  "Keep the moonlight. 달빛을 간직해."  (26쪽) ㅡㅡㅡㅡㅡ   햇살과 햇볕과 햇빛의 차이  남의 편지 엿보니 마음이 간질간질   2023. 7. 25.  저는 혼비씨를 비롯해서 누구에게도 아직 '어른'으로 본을 보일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러 번의 여름을 보내고 나서 알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마~~~ 있다보먄 1주일 뒤, 길어도 2주일 뒤에는 이렇게까지는 덥지 않게 된다는 것. 그러다보면 금세 바람이 서늘해진다는 것, 나뭇잎들이 초록을 잃어가다가 문득 여름의 선명함이 그리워진다는 것을요. 그렇게 몇 차례의 여름과 겨울이 둥글게 순서를.. 2023. 7. 19.
라면을 끓이며 첫문장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라면, 김밥, 짜장면을 먹어왔다. 2023. 6. 17. 김밥은 과자나 떡 같은 주전부리기 아니라, 당당히 '밥'의 계열에 속한다.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가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김밥의 가벼움은 서늘하다. 크고 뚱뚱한 김밥은 이 같은 정서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난 내용물이 쏟아져나올 때 나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14~15쪽) 2023. 6. 18. 죽변등대는 내 아침산책의 끝이었다.. 2023. 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