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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책 이야기

허송세월

by latespring 2025. 2. 14.

 

  새는 마지막 며칠을 견디고 있다. 나뭇잎사이로 햇빛이 들어와서 어미 새 머리가 반짝인다. 새가 알을 품은 지 보름이 되어온다. 이제, 알 속에서는 희미한 생명이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이다. 이 생명은 멀리서 가물거리는 호롱불과 같은데, 그 숨결은 어미 새만이 알고 있다. 새는 서두르지 않는다. (68쪽)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읍(泣)'이라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哭)'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涕)'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모음은 슬픔의 서사구조를 이용해서 울림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 울림은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는 정화기능을 갖는다. (73쪽)

 

 

  충격으로 넑이 빠져 있던 한동안이 지나자 참사 자체를 일상에서 떼어 내서 원격지로 몰아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슬픔이라는 정서는 전망 없고 폐쇄적인 심리 현상이고 한에 침잠해 있으면 개인의 삶은 퇴행하고 국가 경제가 오그라져 먹고살기 어려워진다고 말 힘좋은 논객들이 말했다. (115쪽)

 

 

  일자리가 모자라서 밥 먹기 어려운 시대에 밥 없는 사람들을 밥으로 겁박하면, 사람들은 밥과 죽음의 기로에서 밥 먹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밥과 죽음이 섞여 있는 자리를 향해서 밥 없는 사람들은 가고 또 간다. 살려고 먹는 밥숟가락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 날마다 거듭되는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 동료 인간의 목숨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돌려서 나의 밥을 먹고, 내가 재수 없으면 나의 목숨을 동료 인간의 밥의 토대로 바쳐야 한다면 이런 밥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122쪽)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135쪽)

 

 

  사물이나 현상은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다. 겨울은 춥지 않고, 여름은 덥지 않다. 꽃은 아름답지 않고 똥은 더럽지 않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은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형용사와 부사는 그 단어가 수식하려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 (144쪽)

 

 

  경제학원론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거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은 작동되고 있지만, 그 작동의 결과는 자유와 조화가 아니고 억압과 구속이다. 이 억압과 구속은 밥을 사 먹는 사람과 밥을 팔아서 밥을 먹는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명품 핸드백이나 곡가 자동차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 원이나 5천 원짜리 밥을 먹는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163쪽)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그 사내들의 창자에 스미는 김치찌개 국물과 돼지고기 한 점의 맛을 나는 안다. 그 국물 한 모금의 얼큰함과 고기 한점의 육기가 창자에 스며서 비애의 모서리를 순화시켜 준다. 살아간다는 사업의 무망과 회환 속에서도 그 맛은 비애를 삭히고, 삶의 불씨를 잿더미 속에 잠재워서 보존한다. '고향'에서 혼밥을 먹을 때 나는 여러 혼밥꾼들과 길게 앉아서 나의 혼밥을 먹지만, 나의 혼술 맛으로 다른 사내들의 혼술 맛을 헤아려 알 수 있고, 여러 혼술들이 이 술맛의 고압전류로 이어져 있음을 안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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