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문을 나설 때
2100원 어치의 삶이 남아 있었다
어느 쪽으로 살아갈까
삶 중 100원을 공중전화기에 투입한다
114.
문학사상사.
나는 詩 한 편을 가져가기로 한다
813―420※ 별일 없다
756―087※ 전화 받지 않는다
남은 40원의 삶
잠시 후면 삼켜질 삶을 유여하기 위하여
푸른색 재발신 버튼을 누른 채
전화부스를 뜬다
(40원 어치의 삶을 살해해 줄 연락처도 없다니)
3호선 경복궁역을 가기 위하여
종로 3가를 가기 위하여
토큰을 사려 했으나 토큰가게 문이 닫혀
잔돈을 바꾸기 위하여 700원짜리 담배를 산다
가끔 삶을 쪼개야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며
가게방 주인에게 보태준 만큼의 내 삶을 뒤로 하고
5번 버스에 오른다
250원 내 삶을 버스는 움직여 간다
잠시 나와 같은 량의 삶을 살고 있는 합승자들
나는 가방에서 詩를 꺼내 읽는다
이 詩는 곧 20000원 상당의 삶을 벌어줄 것이다
상품의 질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래야 나는 잘 팔리는 상품이 될 것이다
종로 3가 지하철역
300원의 삶을 다시 투자하고
경복궁역을 향해 지하계단을 내려선다
두 정거장. 삶이 아깝군.
사회생활이란 삶의 보험회사 아닌가
손해라 생각할 필요도 없지. 투자야, 투자.
현대아케이트 빌딩 8층. 문학사상사,
내 생각 한 편을 20000원의 삶으로 지불해 줄
볼일을 마치고 정원으로 내려와
700원의 삶을 뜯고 35원의 삶을 꺼내
연소시켜 버린다 머리가 띵해지며 흐려지는
이 삶은 끊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중독된 삶
길을 건너 전화기에 50원 삶을 투여한다
732―143※.
그를 만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 동상이 지키고 있는 조선총독부
국립중앙박물관을 지나
프랑스 문화원 옆
이조시대 때 왕의 잘못을 충고했다는 사간헌 터
라는 머릿돌 앞 후지필름 상회 위 예방찻집에 오른다
732―143※.
그는 내게 2000원 삶 모과차를 사준다
나는 늘 그에게 삶을 신세지고 산다
자기 삶을 내게 베푸는 그가 고맙다
인왕산 등반 계획과
애인의 생일날 무엇을 선물해 주면 좋아할까
732―143※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방찻집을 나서다
732―143※은 그의 삶을 벌기 위해
일터로 가고 다음에 내가 삶 한 잔 산다고
미안함을 표하고 732―143※과 헤어지다
주머니에 남은 삶을 점검해 보다
전화 삶 150원
담배 삶 700원
버스 삶 250원
지하철 삶 300원
지금까지 산 삶 1400원
잉여 삶 700원
자 이제 오늘의 주요 삶은 살았다
남은 여일을 어떻게 보낼까
나는 우선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다
10원 100원만 받아주는 전화기
억울하게 100원 삶을 투여한다
756―087※. 일없냐, 덜컥.
아니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삶을 또 삼킨다
일, 없어.
에이, 30원 삶을 삼켜버리다니
내 삶을 강탈한 테크놀러지에 화가 나다
813―4205※ 일 없냐, 없어.
10원의 삶을 익명의 사람에게 자선하기로 하고
수화기를 올려놓고 거리를 걷는다
일 없군.
인사동을 고개도 숙이지 않고 지난다
배가 고프다 오늘 끼니는 삶은 계란 두 개
돌아가자 빨리 돈암동 로타리
그럴듯한 이름의 로타리장의사를 지나
가서 사발면이나 끓여먹자
700원
토큰 한 개는 안 판다고 한다
잔돈이 없어서, 잔돈이 필요해서,
화가 난다 잔돈 같은 삶은 화가 자주 난다
다시 걸어 종로 3가에서 미리 사정하고
토큰 한 개를 산다
지병인 공복상태에서의 빈혈과 머리의 식은 땀
남은 삶은 450원
참자 30분 후 나는 라면을 먹을 수 있다
아리랑 고개에서 자리에 앉다
가방을 뒤져보니 10원 삶이 추억처럼 나오다
500원짜리 삶 큰 일꾼 큰 사발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뜨다
종점에 다다를수록 승객들이 내리고
내가 앉은 뒷좌석 흘린 삶이 없나 살피다
슈퍼에 가면 100원 삶에 10원 삶 씩 깎아주니까
잘하면 500원짜리 라면을 먹을 수 있으리라
슈퍼를 보자 큰 슈퍼를
종점 한 정거장 전 미니스톱이 훤하다
종점. 내려 주머니를 뒤적이다
놀라다
310원 삶밖에 안 남다
그렇다면……다시 뒤져보다
버스에서 남이 흘린 삶을 주워보려다
150원 내 삶을, 치명적이다
때론 이렇게 삶을 분실하기도 하는구나
300원 일용할 육계장 삶을 사들고
절로 돌아오다
아직 남은 삶은 10원
나는 오늘 2100원의 삶을 산 것이다
아니 2100원이 나를 살아버린 것이다
- 함민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