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9.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유키코는 선생님한테도 각각의 사원들한테도 신뢰받았다. 온화하고 정확한 일처리가 그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유키코를 눈으로 좇지 않았다. 다만 귀는 유키코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62쪽)
2018.11.13.
선생님은 내 의문에 미리 대답하듯이 말했다. "가구는 좀더 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은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물론 이구치 군도 그런거야 알고 말한 거겠지만 말이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가는 거야.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반복해서 사람 모습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본 일이 있나?"
선생님 물음에 양서류 같은 태아 얼굴이 떠올랐다.
"생물 교과서에서 도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 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174쪽)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180쪽)
2018.11.20.
나는 그렇게 말하고 유키코가 있는 어둠 쪽으로 오른속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유키코의 손이 닿았다. 좀더 찾아서 잡아당기듯이 해서 왼손을 쥐었다.
"자, 갑시다."
유키코의 왼손이 주저 없이 내 오른손을 잡았다. 우리는 꼭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유키코도 움직인다.
"정말 깜깜하네. 여름인데 이렇게 인기척이 없다니."
옆에 눈길을 줘도 유키코의 모습은 어둠에 녹아들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쥔 손의 감촉만이 어둠 속에서 부풀어오른다. 잠시 잠자코 있던 유키코가 "사촌 같아"하고 혼잣말을 한다.
"네?"
유키코가 말을 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사촌이 손을 끌어서 가르쳐주었어. 처음 스케이트를 탔을 때, 사촌은 중학생이었어. 그게 생각났어."
지금보다 한참 작은 유키코의 손.
"남자아이가 이렇게 친절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지. 같은 반 남자애들은 전부 짓궃은 짓만 했거든."
유키코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초등학교 때 여자아이한테 짓궂은 짓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까 주저 없이 유키코 손을 잡은 나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무언가가 시킨 것처럼 손이 뻗어 있었다. (247쪽)
2018.11.25.
마리코가 우스운 듯이 말하고 내 귀에 코끝을 갖다댔다. 초등학생이던 마리코의 둥근 코랑 볼은 어른이 되면서 어린애다운 지방이 빠지고 콧대와 광대뼈의 예쁜 윤곽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마음이 빼앗길 때마다 무방비하게 열렸을 입술도 의지와 감정이 균형을 잡아가자 무리 없이 상큼하게 닫혀져 갔다. 선생님이 가뿐하게 안았던 마리코는 내 팔 안에서 적당한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물론 어린애였던 마리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머리 형태, 손가락 사이로 새는 가는 머리카락, 곧은 등뼈, 둥근 어깨...... 마리코의 형태는 태어났을 때부터 쭉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지금 옆에 앉아서 숨을 쉬고, 말하는 마리코가 사랑스러웠다. 성급한 욕망과는 색채가 다른 감정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마리코의 침실에 벌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서로의 손이 움직이고, 몸이 닿고, 말이 형태를 이루기를 그만둘 때, 닫힌 입이 다시 살짝 열린다. 바닥에 가라앉아서 잠들어 있던 감각이 자극을 받아서 떠오른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싫증나지 않고 좀더 강하고 선명하게 태어나는 이 감각은 어디에서 솟구치는 것일까. 아무리 깊게, 흔들리고, 자기가 사라질 것처럼 느껴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 감각이 사람의 마음 속 저 깊이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던 암흑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리운 어둠. 우리는 그 따뜻한 어둠 속으로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고 호흡을 맞추면서 한없이 내려갔다. (311쪽)
2018. 12. 18.
눈을 감자 마리코가 떠오른다. 마리코는 늘 직구를 던져온다. 내가 얼마나 그 공을 받아치고 있는가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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