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일찍 누웠다. 몸은 뒤척였고, 잠은 덧들었다.
잠과 잠 사이에 무언가 보았다, 환시.
일어나서 유자차를 들었다. 청음생심(聽音生心)인가. 유자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내릴 때, 커핏물은 동일한 속도로 내려지지 않는다. 원두가루는 처음엔 조바심치는 듯이 뜨거운 물을 받아내고, 뜨거운 물은 원두에 스미기 무섭게 거름종이 밑으로 급히 떨어진다.
내려진 커핏물과 거름종이가 가까워질수록 커피 내리는 속도는 느려진다. 그네들끼리 촘촘히 엉긴 원두가루가 뜨거운 물을 오랫동안 부여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커피는 진했다.
오늘도 도망쳤다. 3층 서가에서 책을 뽑아 2층에서 읽었다. 시를 옮겨 적는데, 다른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접어두고 흑산을 읽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흑산의 지면들이 얼마남지 않아서, 나는 중간중간 커피를 홀짝거렸다. 읽기를 마쳤을 때, 커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물결의 흐름을 읽었다. 혹 주위에 어떤이가 전류의 흐름을 읽고 있다면, 그건 나와 다른 것을 들여다 보면서 같은 이치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말이 적어지니, 잡념이 많아진다.
해 질 녘,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밥을 먹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숟가락을 움켜 쥐고, 밥을 퍼먹었다.
돌아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 곧장 집으로 왔다.
나를 유폐시켰던 공간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 밤공기 보다 볕이 좋아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