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풍경과 상처/책 이야기

달 너머로 달리는 말

by latespring 2022. 8. 3.

 

  야백은 입속에서 혓바닥을 돌려 재갈이 물려 있는 이빨 사이를 더듬었다. 재갈은 거기에, 본래 돋아난 몸 일부처럼 물려 있었다. 혓바닥에 와 닿는 쇠의 감촉이 이제는 낯설지도 않았다. 재갈은 거기가 제자리인 듯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야백은 성벽 여장 윗돌에 입을 부딪었다. 야백은 고개를 휘둘러서 이쪽저쪽 어금니를 돌에 부딪었다. 온몸의 힘이 목으로 모였다. 잇몸에서 피가 흐르고 오른쪽 어금니가 흔들렸다. 야백은 혓바닥으로 흔들리는 어금니를 밀어냈다. 오른쪽 어금니가 빠져서 혓바닥 위에 떨어졌다. 야백은 혀를 털어서 이빨은 뱉어냈다. 야백은 왼쪽 빰을 돌에 찧었다. 초저녁 어둠 속에서 야백의 이마에 푸른빛이 돋아났다. 안쪽으로 가라앉는 깊은 빛이었다. 야백은 달이 뜰 때까지 입으로 돌을 들이받았다. 왼쪽 어금니도 떨어져 나갔다. 이 빠진 자리는 초원처럼 넓게 느껴졌고 바람이 드나들어서 잇몸이 시렸다.

  재갈은 땅 위로 떨어졌다. 야백은 땅바닥에 뒹굴며 버둥거려서 등에 얹힌 안장을 벗어냈다.

 

  재갈에서 풀려날 때, 야백은 사람의 밥을 벌고, 사람이 걸어주는 장신구를 붙이고, 사람을 태우고 달린 생애의 시간이 몸속에서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 지나간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아서 이 빠진 자리는 빈 채 서늘했다. 창자 속의 똑이 마려운 기색도 없이 저절로 빠져나갔다. 똥은 단단하고 향기로웠고 땅 위에 떨어져서도 둥글었다. 야백은 갈기를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야백은 성벽이 순찰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앞다리가 땅에 닿기 전에 뒷다리가 땅을 차서 몸은 무게를 버린 듯이 빠르게 흘러나갔다. 네 다리는 몸을 공중으로 띄울 뿐, 몸이 스스로 나아갔다. 재갈과 안장이 없이, 방향도 없이, 사람을 태우지 않고, 야백은 순찰로가 끝나는 상양성의 끝까지 달렸다. 별이 깔려서 눈이 내리는 듯했고, 야백의 이마 빛에 푸른 서슬이 돋아 났다. (146, 147쪽)

 

 

 

  칭은 묘동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의 가왕이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칭은 칼이 다가오는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했다. 가왕이 죽고, 세상이 모두 죽은 가왕을 진짜로 안다면 칭왕 자신이 죽은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죽은 것이 진짜고 자신이 가짜인가 싶었다.

  다시 상양성으로 돌아가서 왕 노릇을 하려면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듯싶었다. 칭왕은 근위 시종장에게 물었다.

  ㅡ가왕은 진짜 죽었느냐?

  ㅡ죽었습니다.

  ㅡ어찌 그걸 아느냐?

  ㅡ적들이 가왕의 머리만을 잘라서 가져갔고 몸통은 버렸으니,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

  ㅡ그 몸통은 진짜 가왕의 몸통이냐?

  ㅡ입은 옷이 진짜와 같았습니다.

  ㅡ그럼 적들은 내가 죽은 것으로 알겠구나.

  ㅡ머리통을 가져갔으니 그러할 것입니다.

  ㅡ적들은 가져간 머리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닌가?

  ㅡ그야, 적이 아니고서야 알기가 어렵사옵니다.

  ㅡ그렇겠구나. 적이 나를 시체로 안다면 나는 왕이 아니로구나. 적에게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리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나의 목적은 위급한 성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죽자는 것이 아니었다.

  ㅡ서두르실 일이 아닙니다. 적들이 전하가 살아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전하에게 불리하지 않습니다.

  ㅡ백성들도 내가 죽은 것으로 아느냐?

  ㅡ백성들은 신경 쓰지 마옵소서. 백성들은 제 자식과 제 논밭만 아는 자들이옵니다.

  ㅡ진짜 가왕이 죽어서, 내가 가짜 가왕이 되었구나. 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

  ㅡ폐하, 말씀이 어렵사옵니다.

  말은 겉돌아서 대답이 되어지지 않았다. (184, 185쪽)

'풍경과 상처 >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0) 2023.05.08
하얼빈  (0) 2022.08.11
마음의 사생활  (0) 2022.02.23
[김훈칼럼] 호박잎, 오이지, 새우젓  (0) 2020.10.23
박하 中  (4) 202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