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6.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중략)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35~36쪽)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45쪽)
2023. 5. 8.
35킬로 지점을 통과한다. 여기서부터는 나에게 있어 '미지의 땅'이다. 나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35킬로 이상의 거리를 달린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왼편으로는 자갈투성이의 황량한 산들이 솟아 있다. 한눈에 봐도 불모의 산들이다. 도대체 누가, 어떤 신들이 이런 것을 일부러 만들었을까? 오른편은 끝없이 이어지는 올리브 밭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살갗을 괴롭히는 바람이 바다 쪽에서 계속 불어오고 있다. 왜 이렇게도 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하는 것일까?
37킬로 부근에서 모든 것이 싫증 나버린다. 아, 이젠 지겹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체내의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난 것 같았다.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를 멈추고 물을 마시게 되면 그대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도로 옆의 빈터에서 흩어져서 행복한 듯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에게도, 차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에게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셔터 소리가 너무 크다. 양의 수가 너무 많다. 셔터를 누르는 건 사진가의 일이고, 풀을 뜯어 먹는 건 양들의 일인 것이다. 불평을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화가 난다.
(중략)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101~103쪽)
2023. 5. 9.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115~116쪽)
2023. 5. 11.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정도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ㅡ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171쪽)
앞에서도 썼지만,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185쪽)
2023. 5. 12.
나는 올겨울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마라톤 풀코스 레이스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또 어딘가에서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어간다.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러헥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257~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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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산 책 한 권 읽기를 마쳤다. 달리기에 관한 글을 읽다 보니 달리고 싶어졌고, 싸이클과 수영에 관한 부분에서는 나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트라이애슬론에 도전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 마지막에, 작가가 이 책은 에세이 보다 회고록이라고 한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남자 기대수명의 반쯤을 흘러보낸 시점에서, 내가 회고록을 쓴다면 내 생애 어떤 부분일지 어떤 내용일지 생각해 봤는데, 아직 가늠되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서 양손에 책을 쥐고 읽을 수 있는 시간들에, 그 여유를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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