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1.
첫문장 그날도 오늘처럼 온통 눈이 내렸다.
도쿄에서 사카구치 안고를 떠올리고, 이상까지 걱정하다니, 그녀는 오늘따라 자신이 좀 엉뚱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상은 평소에도 일본어를 썼을까? 한주는 다시 카페를 둘러보았다. 실내에서 들려오는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가 각각의 나라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는 상상이 따라왔다. (중략)
그후 한주는 긴자의 도토루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로는 더이상 말할 수 없는 사람. 일본어로 말할 수 있지만 일본인은 될 수 없는 사람. 그녀는 자신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희미해지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각각의 언어가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이 카페는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떠남이 예정돼 있는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그녀 또한 그다지 특별하게 잘못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50~51쪽)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 내 자리에서. (74쪽)
"분명하게 고르거나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삶에는 훨씬 많습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 인생에는 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103쪽)
2023. 5. 24.
"너가 좋아하는 거, 생일에 먹는 맥도날드 치즈버거 세트. 내가 좋아하는 거, 밀크세이크에 찍어 먹는 감자튀김."
한주는 이제 계속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듯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유키노는 그 말을 들으며 순서가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고 나니 좋아하게 되는 일.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기억에 없는 모텔의 욕조를 떠올리며 보냈던 그간의 생일들과는 달리 모처럼 가벼운 마음이 되었으니까. 유키노는 한주를 따라 감자튀김을 밀크세이크에 찍어 먹어보았다. 맛은 좋지 않았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6쪽)
2023. 5. 25.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다정한 음성을 가장해 자신의 궁금증만을 채우려고 한다. 채워지면 금방 잊고 그 자리를 떠난다. 채워지지 않으면, 어두운 욕망으로 지어낸 이야기를 여기저기 옮기고 다닌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추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일찌감치 파악할 수 있었다. (207쪽)
"그이를 만난 건 대학생 때였지, 단풍잎과 하늘밖에 없는 것처럼 맑고 고요한 가을이었어."
유학 시절, 어머니는 대학 안에서 벌어진 시위 속에서 아버지를 처음 봤다고 했다. 시위의 마지막 무렵, 아버지는 단상 위에 올라가 선동적인 노래 대신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고 한다. 웅장하지도 장엄하지도 않은 곡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어머니는 그 곡을 듣는 순간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209쪽)
추는 아버지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대신, 틈틈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그의 손을 상상해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거나 손등과 손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며, 추는 손에는 표정이 없으므로 쉽게 슬퍼지거나 그리워지는 감정이 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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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한주였고, 유키노였고, 추였다.
오키나와, 도쿄, 오타루의 온도와 습도를 느끼면서, 새삼스레 작가의 전지전능함을 생각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없어도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있음을 믿는다.
눈길을 멈추게 하고 뇌리에 새기듯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문장이 있다. 그 몇 문장은 가슴이 시려 옮겨 적지 않는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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