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31.
첫문장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14쪽)
"밥은 같이 먹어야 맛이야."
할머니의 말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어떤 사람과 먹느냐에 따라서 맛이 다 다르니까. 혼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는 게 훨씬 더 편한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밥은 맛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먹는 밥은 맛이 있었다. (28쪽)
2023. 6. 1.
삼천아, 잘 먹고 잘 자고 있지. 너를 생각하면 내가 너에게 소리지르구 나쁘게 말하던 게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 희자가 갓난쟁이고 내가 제 정신이 이니었어.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러지를 못했다. 인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갔니. 미안해, 삼천아. (119쪽)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삼천아, 건강히 잘 있어. (121쪽)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156쪽)
2023. 6. 3.
ㅡ새비야.
ㅡ응.
ㅡ내레 아까워.
ㅡ뭐가.
ㅡ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ㅡ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고,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ㅡ……
ㅡ나는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디 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258쪽)
길에서 만나면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희자는 그렇게 쓰고 작은 크기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을 할머니에게 보냈다. 사진 속에서 검은 테의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쓴 희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희자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봤다. 할머니는 희자에게 줄 만한 마땅한 사진이 없었다. 그 대신 할머니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무엇 하나 덧붙이지도 빼지도 않고 써서 희자에게 부쳤다. 남편의 중혼도, 아버지에게 했던 자신의 저주 섞인 말도... 아이를 재우고 밥상에 앉아서 편지를 쓰는 동안 할머니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모든 걸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그 상대가 십 년 가까이 얼굴조차 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나쁘지 않았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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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빌려준 책을 읽었다. 100년 간 증조모, 조모, 엄마, 나의 기록.
할머니의 이야기를 나의 입을 통해 다시 풀어나가는 부분이 읽기에 어색한듯 했지만, 더 나은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씨줄에 삼천이와 새비가 엮어가는 생애의 날줄이 눈물겨웠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그네들의 모습과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은 긴 소설을 빠르게 읽어 낸 힘이 되었다.
접힌 책모서리와 밑줄 쳐진 문장을 보면서 동료의 생각을 헤아려 봤던 재미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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