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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책 이야기

희랍어 시간

by latespring 2013. 12. 24.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55쪽)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161쪽)



어제는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을, 오늘은 희랍어 시간을 읽었다. 중앙도서관에서 읽은 마지막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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