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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책 이야기

가마, <라면을 끓이며>

by latespring 2018. 4. 17.

  빚어내는 이 응집력이야말고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 터전이다. 그 터전은 인간의 꿈을 받아들여주는, 귀화할 만한 자리이다.

  흙과 물을 반죽할 때, 그것들은 인간의 손금으로 스밀 듯이 인간의 살에 밀착한다. 반죽은 거의 인간의 살의 연장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들어 있는 꿈과 아름다움의 모양새를 그 반죽을 주물러 실현할 수 있다. 물레의 회전운동은 그 꿈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공간화시켜준다. 물은 흙의 물리적 성질을 변화시키고, 불은 물과 흙, 그 두 쪽을 모두 화학적으로 변화시킨다. 손으로 빚어진 반죽은 그릇의 모양을 갖추었으되, 아직 그릇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의 잠재력이며 그릇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불을 만나기 전의 반죽의 아름다움은 몽상 속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반죽의 아룸다움은 흙의 깊은 안쪽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들의 아름다움이다. 불이 그 가능성을 발현시킨다. 빚어진 그릇이 구워질 때, 물은 흙을 떠난다. 물이 흙을 떠날 때 물은 제 몸을 거두어가고 그 기능만을 흙 속에 남기는데, 흙은 물이 남기고 간 가소성에 의지해서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고는 불이다. 가마 속으로 들어간 그릇의 가능성들은 익어가는 가마 전체의 틀 속에서 저마다의 운명을 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