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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책 이야기

검은 꽃

by latespring 2019. 3. 29.

 

 

  처음 첩첩산중의 숯골에서 그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너무도 기이한 그 종교의 탄생설화에 단박 매료되었다. 그것은 정녕 이상한 이야기였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향 위도에선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곳에선 일 년에도 수십 번씩 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 현현하였다. 그런데 그 신이 인간의 몸을 떠나지 않고 아예 평생을 살아버린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을 박아 꿈쩍도 못 하게 나무에 박아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처형방식의 잔혹함은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빌려 온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결국 무력하게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리고 그 자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애써 죽더니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제 몸을 그대로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어쩌면 이야기에 가득한 그 모순들에 그는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이며 인간이고 전능하면서 무능하며 끔찍하면서 신비로웠다.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하는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그 고귀한 사람의 아들이 눈앞에 있는 이 하찮은 도둑놈에게 나타나, 나는 너를 대신하여 죽은 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준비한 또다른 모순인가. 아닐 것이다.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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