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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속수무책

안녕, 낯선 사람

by latespring 2024. 11. 7.

 

  여긴 여름이야

  거긴 어때?

 

  여름을 잘 보내란 말은 이 여름

  더이상 만나주지 않겠다는 말

  기대를 기대하는 마음과 다가올 계절에게

  끝내 가다가고야 마는 감정은

  어디서 태어나나요

 

  밤이었어요 신열을 앓는 도시와 더위에 희석된 8월

  열대야의 단면에선 약속들이 기척 없이 태어나고

  나는 무의미한 약속에 의미를 부여하고야 마는

  고약한 성질을 가졌지요

 

  브로콜리 숲엔 죽지 않는 구관조가 산대요

  갓 배운  건 말이 아니라 이름이었대요

  날기 전에 태어나는 걸 배운 새처럼

  손가락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잡은 손금은

  쥘 때마다 운명이 바뀌기도 했대요

 

  고가도로에 죽은 새는 누가 치울까

  애매해질 바에 그냥 죽어버릴래

  미안한데 빈칸 하나 없는 유서를 곧잘 썼거든요

 

  당신을 만날까 했던 빈 마음과

  내게만 바쁜 당신의 요일을

  손가락 접어가며 헤아려보는 중이었어요

 

  숲에는 초록으로 표백된 새들이

  백야를 끊임없이 앓았고요

  무해한 얼굴을 가진 나무의 표정을 읽느라

  답장을 쓰지 못했어요

 

  우리는 할 수 있는 착한 일을 모두 하고 나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많은 약속이 있었지만 당신은 떠난 뒤였어요

  나는 내가 누군지

  깨닫지 못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 김희준